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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산 이야기

알고 있어!?
유구한 시간이 흐르는 돌의 섬

~바다를 건너 일본의 토대를 구축한 세토우치 비산 제도~

1.일본의 건축 문화를 지탱하는 돌

일본의 근대화가 추진된 메이지시대 후기부터 쇼와시대 초기에 걸쳐서 일본은행 본점 본관과 메이지 생명관 등, 일본을 대표하는 여러 근대 서양식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이 건축물에는 세토 내해의 섬들, 특히 오카야마현과 가가와현 사이에 위치한 비산 제도에서 채석된 화강암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성곽의 돌축대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석조 건조물로 널리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 기술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오사카성의 돌축대입니다. 오사카성은 도쿠가와 막부가 여러 지방영주를 동원하여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하였습니다. 지방영주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거대한 돌을 운반해 와서 웅장한 돌축대를 쌓아올렸습니다. 이 돌축대에도 비산 제도에서 운반해 온 석재가 대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적 건조물은 비산 제도의 돌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습니다.

2.채석의 역사

돌의 원산지인 세토 내해의 비산 제도는 혼슈와 시코쿠 지방 사이를 흐르는 세토 내해에 위치합니다. 쇼도시마섬, 시와쿠 제도, 가사오카 제도 등 크고 작은 무수한 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섬에는 평지가 적고 산에서 해안까지 이곳 저곳에 거석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섬의 특징을 살려 에도시대 이후, 양질의 돌이 채석되어 건조물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채석업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초바’라고 불리는 채석장입니다. 돌에 철로 된 쐐기를 박아 넣어 돌을 쪼개는 것을 ‘키루’라고 하는데, 큰 돌을 쪼개려면 돌의 결을 읽는 고도의 기술과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쇼도시마섬에 남아 있는 에도시대의 오사카성 돌축대의 채석장 터에서는 지름 2∼3m 또는 그 이상의 할석이 산 표면을 따라 부근 일대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 풍경은 오래전 지방영주들의 지휘 하에 경쟁하듯이 돌을 캐고 쪼갰던 채석 작업 광경을 떠오르게 합니다. 돌에는 쐐기를 박아 넣은 흔적과 채석한 석공을 알 수 있는 각인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채석업이 성행하자 채석 기술자들이 섬으로 찾아들었고, 그로 인해 돌을 가공하고 이용하는 문화가 섬에 생겨났습니다. 시와쿠 혼지마섬에서는 고가라스 신사 도리이나 ‘도시요리’라고 불리는 섬의 통치자 무덤 등, 갖가지 대형 석조물들이 만들어졌었습니다.

메이지시대에 접어들어 채석업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가사오카 제도의 기타기시마섬에서 채굴된 화강암‘기타기이시돌’은 도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근대 건축물에 사용되었습니다. 기타기이시돌을 사용한 중요문화재 건조물은 니혼바시 다리, 도쿄 역 마루노우치 서점 등 많습니다.

그 후, 1950년대에 접어들면 도구의 기계화로 대량의 채석이 가능해졌습니다. 따라서 석공들은 산을 잘라내기라도 하듯이 양질의 돌을 찾아 점점 깊게 돌을 파내려 갔습니다. 그 결과로 돌이 깊숙히 깎여져 나가 가파른 절벽 모양의 채석장이 탄생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산 제도의 섬들을 둘러보면, 약 400년에 걸친 채석 기술의 변천을 직접 느껴볼 수 있습니다.

3.돌의 산지를 지탱한 해운업

비산 제도의 섬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본토와 떨어져 있지만, 채석업은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다가 섬들을 이어주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해상 운송을 통해 거대한 돌들을 먼 곳까지 운반했던 것입니다.

세토 내해의 섬들은 서일본에서 해상 교통의 대동맥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섬에는 각 섬을 이어주는 항구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채석한 거석을 운반하기 위한 산업항은 자연의 지형을 살린 후미를 물류 거점으로 하였습니다. 적은 양을 운반했던 작은 항구에는 채석한 돌의 자투리로 쌓아올린 호안이 남아 있습니다. 돌벽 창고도 돌 원산지 특유의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간장 창고 앞에는 간장을 짜내는데 사용하는 현지 석재로 만든 누름돌이 나란히 늘어서 있습니다.

에도시대, 거석은 주로 시와쿠 제도의 주민들이 운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해상 운반 능력과 뛰어난 항해 기술은 중세의 시와쿠 수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와쿠 제도는 중세에는 시와쿠 수군, 에도시대에는 시와쿠 화물수송선의 근거지이며, 막부 말기에는 막부의 군함 간린마루의 승무원을 다수 배출한 선원의 성지였습니다.

비산 제도의 섬들에서는 복잡한 구획으로 정비된 촌락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와쿠의 중추인 혼지마섬의 가사시마 지구에서는 좁은 도로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방위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가사시마 지구의 주요 도로는 ‘맛초도리’라 불리며 길가에 일본 전통 양식의 가옥이 나란히 들어서 있습니다. 가옥이 들어서 있는 모습은 번영을 누렸던 당시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가사오카 제도의 마나베시마섬도 시와쿠 수군과 어깨를 겨루는 중세의 마나베 수군의 거점이었는데 이런 명성에 걸맞게 산성 기슭에 방위적인 구획으로 정비된 촌락이 있습니다. 또한 쇼도시마섬의 도노쇼 촌락은 ‘미로의 마을’이라 불리며 지도가 없으면 방향을 찾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비산 세토의 섬은 산과 암석 지대, 모래사장 등 변화가 풍부하고 바위가 노출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섬 중에서 산과 바다가 일체가 되고 작고 기능적인 지형을 가진 섬은 채석과 돌의 육지 운송과 해상 운송에 편리했습니다.

4.돌과 공존하는 생활 문화

비산 제도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큰 돌과 공존해 왔습니다. 섬 주민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안겨 준 산의 거석은 사람들의 숭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바위 표면을 파내어 만들어진 산악 영지 등에는 공덕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석재 산업이 가장 번영을 누렸던 시대, 섬은 채석에서 수송까지 석재 산업 전반을 섬 내에서 일괄 처리하는 산업 도시로 활기를 띄었습니다. 그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석재 산업을 지탱했던 석공들의 생활 문화입니다. 섬의 석재 산업은 부를 낳고 사람들은 문화와 오락을 남겼습니다. 섬에 있는 영화관은 과거에 석공들이 여가를 즐기도록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이런 시설은 당시 섬의 번영했던 모습을 알려 줍니다.

그밖에도 석공들의 노동가인 이시키리 노동가, 춤이 가미되어 계승되고 있는 세키부시 노동가, 경사시의 특별한 날에 석공이 먹었다고 하는 이시키리 스시 등, 석재 산업을 지탱했던 석공들의 귀중한 전통문화가 지금도 나날의 생활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배를 타고 섬을 향하면, 쾌청한 하늘과 평온한 시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토 내해의 바다를 느끼면서 돌의 문화를 체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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